대한산부인과학회가 붕괴 위기에 처한 분만 인프라와 지역 필수의료를 살리기 위해 전방위적 대응에 나선다. 현재 산부인과가 직면한 필수의료 위기는 산부인과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골든타임이라는 게 학회의 진단이다.
이에 산부인과학회는 학회 관련 5개 단체와 손잡고 돌파구를 모색할 예정이다. 오는 4월 영남권을 시작으로 서울과 호남권에 이르기까지 전국 순회 포럼을 개최, 현장의 목소리를 수렴하고 이를 정책에 반영할 수 있도록 보건복지부와 긴밀하게 협의해 나가겠다는 복안이다.
산부인과학회 이재관 이사장은 지난 9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산부인과 필수의료는 임신·분만에서 양성수술, 부인암, 자궁경부암 검진까지 여성의 생애 전반에 걸친 연속선”이라며 “하지만 지금 산부인과 필수의료는 의사가 없어서가 아니라, 버티기 어려운 구조 때문에 무너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이사장은 “분만과 부인암 진료는 한 번 붕괴되면 회복에 10~20년이 걸리는 만큼 지금이 사실상 마지막 골든타임”이라며 “분만 인프라·수가·부인암·검진 체계를 패키지로 동시에 손보는 접근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학회는 수가 체계의 근본적 개선과 의료사고 법적 보호 장치 마련, HPV(인유두종 바이러스) 검사 국가암검진 도입을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분만 가능 의료기관 10년간 40% 감소…수가체계 개편 시급
산부인과학회 이상훈(고려대안암병원) 사무총장은 현재의 위기를 “인구 감소가 아니라 아이를 낳을 병원과 의사가 없는 상태”로 규정했다.
학회에 따르면 지난 10여 년 동안 분만 가능 의료기관은 약 700곳에서 400곳 수준으로 감소했다. 전국 250개 시·군·구 가운데 분만기관이 한 곳도 없는 지역도 30%를 넘었다. 분만기관이 한 곳만 남은 지역까지 합치면 전체의 절반 이상이 '위기 지역'으로 분류된다.
저출산으로 전체 분만 건수는 줄었지만, 산모 평균 연령 상승과 만성질환 증가로 고위험 임신·분만은 오히려 늘고 있는 것도 문제다. 분만 건수는 감소하는데, 한 건 한 건이 더 어렵고 위험해지는 ‘구조적 역설’이 발생하고 있다는 게 산부인과학회의 지적이다.
학회는 분만을 실제로 수행하는 인력의 '급여와 시간'을 직접 지원하는 것이 해결방안이라고 했다. 분만을 시행하는 산부인과 전문의와 분만취약지 간호사·조산사의 고용비용을 국가가 일정 부분 직접 보전하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사무총장은 “분만기관이 없거나 1곳뿐인 분만취약지 의료기관에 대해서는 고위험 산모·신생아 통합치료센터 운영비를 포함해 재정 지원을 집중하여 '마지막 분만 거점'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위험 산모·신생아를 전담하는 산과·소아청소년과 전문의에게는 별도 인센티브와 야간·휴일·응급 분만 가산 수가를 부여해 위험과 책임에 걸맞은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도 했다.
특히 “환자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건당 수가로 버티라는 것은 폐업하라는 말과 같다”며 “산부인과 인프라를 국방이나 소방처럼 ‘국가 안전 인프라’로 재정의하고 건당 수가에서 ‘기능 유지 보수’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현재 분만 관련 수가는 DRG 수가체계로 운영되고 있다. 예정된 제왕절개와 응급 제왕절개, 태반조기박리·전치태반 같은 응급 상황, 유도분만 실패 후 전환 등 위험도와 응급도가 전혀 다른 상황이 DRG 수가체계에서는 동일하게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학회는 DRG를 위험도·응급도 기준으로 세분화하고, 고령산모· 다태임신· 고혈압· 당뇨· 이전 제왕절개 등 고위험 요인에 따른 가산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야간· 휴일· 응급 분만에 대한 별도 가산을 더해 '언제 어디서나 안전하게 분만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센티브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자궁동맥 색전술, 산과 응급키트, 혈액제제, 마취 관련 재료비 등 필수 의료재료비를 포괄수가에서 분리해 별도로 보상하는 방안도 제안했다.
이 사무총장은 “환자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건당 수가로 버티라는 것은 폐업하라는 말과 같다”며 “산부인과 인프라를 국방이나 소방처럼 ‘국가 안전 인프라’로 재정의하고 건당 수가에서 ‘기능 유지 보수’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양성수술과 부인암 진료를 위한 공공정책수가 신설도 요구했다. 학회는 복강경수술 등 고난도 양성수술에 대해 인증제와 질(quality) 연계 가산을 도입, 수술 난이도와 결과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DRG 구조를 손질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난소암 종양감축술, 광범위 자궁절제술 같은 부인암 수술에 대해서는 기존 행위수가에 정책 가산을 더하는 '부인암 공공정책수가'를 신설, 이를 통해 다학제 진료와 응급·야간 수술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했다.
전국 순회 포럼으로 지역 인프라 붕괴 막을 돌파구 모색
학회는 대한모체태아의학회, 대한산부인과의사회, 직선제대한산부인과개원의협의회, 대한분만병의원협회 등 5개 단체와 지역 필수의료 현장을 점검하고 돌파구 모색에 힘을 모으기 위해 오는 4월 영남권을 시작으로 전국 순회 포럼을 개최할 예정이다.
오는 4월 부산에서 열리는 춘계 학술대회는 개원의 단체와 통합하여 한목소리를 내고, 6월에는 수도권에서 분만 인프라 살리기를 주제로 분만병의원협회와 7월에는 인프라 붕괴가 가장 심각한 호남권에서 지역 단체장 및 복지부 관계자가 참여하는 대규모 정책포럼을 개최한다.
이상훈 사무총장은 “전남의 산모가 조산 위험이 있어도 인프라가 무너져 충청도를 거쳐 경기도 아주대병원까지 올라와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지역 필수 의료 회생의 시급성을 거듭 호소했다.
“자궁경부암은 퇴치 가능한 감염병”…검진 체계 현대화 주문
여성 건강권 보호를 위한 자궁경부암 근절 대책도 제안했다.
이대서울병원 주웅 원장은 “자궁경부암은 HPV(인유두종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병으로, WHO의 목표처럼 충분히 근절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주 원장은 검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현재의 세포 검사는 민감도가 50~70% 수준으로 낮아 환자를 놓칠 위험이 있다”며 “민감도가 높고 검사 주기를 조절할 수 있는 HPV 바이러스 검사를 1차 선별 검사로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한 “한국 여성에게 흔한 52번, 58번 바이러스를 예방하기 위해 현재의 4가 백신 위주 지원 정책을 9가 백신으로 상향하고 남성 접종도 확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간담회에서는 산부인과 기피의 핵심 원인인 사법 리스크에 대한 성토도 이어졌다.
학회는 “무과실 사고임에도 1심에서 24억 원 배상 판결이 나오는 상황에서 누가 산부인과 의사를 하겠느냐”며, 불가항력 사고에 대한 국가 보상 한도를 10억 원으로 상향하고 형사 기소 면책권을 부여할 것을 정부에 강력히 요구했다.
아울러 고위험 분만 수가를 위험도에 따라 3~5등급으로 세분화하여 최대 500%까지 인상하는 안을 복지부와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이 이사장은 “정부가 예산과 제도 개선에 전향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분만 인프라의 완전한 붕괴를 막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